조선 후기, 천주교에 대한 참혹한 탄압과 박해가 이어지던 시기에 고국 프랑스를 떠나 목숨을 걸고 조선 땅을 밟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모방(Pierre Maubant, 피에르 모방) 신부와 샤스탕(Jacques Chastan, 자크 샤스탕) 신부입니다.
두 성인은 박해의 위험 속에서도 조선 신자들을 찾아 전국을 순방하며 성사를 집전하고, 한국인 사제를 양성하기 위해 최초의 신학생들을 선발하는 등 한국 천주교회 역사에 잊을 수 없는 거룩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낯선 이국땅에서 신자들의 진정한 목자로 살아가다 마침내 순교로 삶을 바친 두 선교사의 삶과 숭고한 영성에 대해 자세히 알아봅니다.
1.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의 입국 배경
19세기 초 조선 천주교회는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사제가 없어 성체성사를 받지 못하는 깊은 영적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조선 신자들은 교황청에 지속해서 사제를 파견해 줄 것을 청원했고, 이에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1831년 '조선대목구'를 설정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파리 외방전교회의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낯선 동방의 나라 조선을 자신의 사목지로 자원하였습니다.
- 모방 신부 (Pierre Maubant, 1803~1839): 1836년 1월, 만주를 거쳐 압록강 국경을 넘어 서양인 사제로서는 최초로 조선 입국에 성공했습니다.
- 샤스탕 신부 (Jacques Chastan, 1803~1839): 모방 신부의 뒤를 이어 1836년 12월 국경을 넘어 조선에 무사히 진입했습니다.
두 사제는 앵베르 범 주교와 함께 조선 땅에서 사목 활동을 펼치며 박해받던 조선 신자들에게 비할 바 없는 영적 위로를 가져다주었습니다.
2. 낯선 땅에서의 사목 활동과 헌신
조선에 도착한 두 신부는 양반이나 상민을 가리지 않고 조선말을 익히며 신자들의 삶 속으로 깊이 들어갔습니다. 당시 서양인의 출현은 곧 체포와 죽음을 의미했기에, 두 사제는 한복과 상복을 입고 얼굴을 가린 채 야간을 이용하여 교우촌을 비밀리에 방문했습니다.
은밀한 신자 순방과 성사 집전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서울을 비롯하여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등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교우촌을 신출귀몰하게 순방했습니다. 밤새 고백성사를 주고 미사를 거행하며, 오랫동안 성사를 받지 못해 목말라하던 조선 신자들에게 영적 양식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혹독한 추위와 배고픔, 체포의 공포 속에서도 목자로서의 책무를 단 한 순간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인 최초의 사제 양성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선발)
특히 모방 신부는 한국 천주교회의 미래를 위해 현지인 사제 양성이 필수적임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모방 신부는 조선 청년들 가운데 영성과 지혜가 뛰어난 어린 소년들을 선발하였는데, 이들이 바로 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입니다.
모방 신부는 이들에게 직접 라틴어와 기본 학문을 가르친 후, 1836년 12월 마카오 신학교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이 혜안 덕분에 훗날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와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가誕生할 수 있었습니다.
3. 기해박해와 숭고한 자수
1839년, 조정에서는 천주교를 철저히 뿌리뽑기 위해 '기해박해'를 일으켰습니다. 성하상 요한을 비롯한 주요 신자들이 체포되고, 신자들에 대한 가혹한 고문과 처형이 잇따랐습니다. 포졸들이 선교사들의 행방을 쫓으면서 교우촌 전체가 유혈 진압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앵베르 주교는 자신들 서양인 선교사 때문에 더 많은 조선 신자들이 희생되는 것을 막고자 결단을 내렸습니다. 앵베르 주교는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 자수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칩니다."
이 요청을 받은 두 신부는 교우들의 안전과 보호를 위해 망설임 없이 순종하였습니다. 자신들이 스스로 나타남으로써 신자들에게 가해지는 박해의 칼날을 거두고자 한 위대한 사랑의 결단이었습니다.
4. 새남터에서의 순교와 성인품 추대
자수한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는 한성 포도청으로 이송되어 혹독한 문초와 고문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조선 신자들의 이름을 대지 않았으며,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 순교 일자: 1839년 9월 21일 (음력 8월 14일)
- 순교 장소: 한강 변 새남터 백사장
- 순교 형벌: 군문효수형 (군법으로 목을 베어 걸어두는 형벌)
두 선교사는 새남터 형장에서 기꺼이 목을 내어주며 36세라는 젊은 나이에 피를 흘려 순교했습니다. 이들의 숭고한 희생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신자가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조선 교회의 믿음의 뿌리는 더욱 깊어졌습니다.
이후 시복시성 절차를 거쳐 두 사제는 다음과 같이 교회의 성인으로 선포되었습니다.
- 1925년 7월 5일: 교황 피오 11세에 의해 시복 (복자품에 올라감)
-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창설 200주년을 맞아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서울 여의도에서 시성 (103위 한국 성인으로 추대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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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두 선교사가 오늘날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의 삶은 단순한 종교적 역사에 그치지 않고, 참된 사랑과 헌신이 무엇인지 일깨워 줍니다.
- 인종과 국경을 초월한 헌신적 사랑: 언어와 문화가 완전히 다른 낯선 이국땅에서 자신을 낮추어 한복을 입고 조선 사람처럼 살아가며 신자들을 품었습니다.
- 미래를 도모한 장기적 안목: 위험한 박해 상황 속에서도 한국인 사제 양성을 도모하여 한국 교회가 자립할 수 있는 기초를 놓았습니다.
-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 목자적 희생: 신자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진 자수와 순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그대로 본받은 삶이었습니다.
지금도 서울 마포구 절두산 순교성지와 용산 새남터 순교성지, 그리고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등지에는 두 성인의 영성과 헌신을 기리는 흔적이 깊게 남아있습니다. 낯선 땅에서 신자들의 진정한 목자가 되었던 두 선교사의 숭고한 정신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깊은 울림과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